시카고 쿠거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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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시카고 쿠거스는 1972년부터 1975년까지 활동했던 WHA의 아이스하키 팀이다. 1973-74 시즌에는 동부 디비전 4위를 기록하며 플레이오프에 진출하여 결승까지 진출했으나, 휴스턴 에어로스에 패했다. 재정적인 어려움으로 인해 1974-75 시즌 종료 후 해체되었으며, 선수들은 분산 드래프트를 통해 다른 팀으로 이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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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카고 쿠거스 - [스포츠팀]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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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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팀 명칭 | 시카고 쿠거스 |
연고지 | 일리노이주 시카고 |
리그 | 세계 하키 협회 |
운영 기간 | 1972–1975 |
홈 경기장 | 인터내셔널 엠피시어터 랜드허스트 아이스 아레나 |
상징색 | 금색, 녹색 |
운영 | |
구단주 | - |
단장 | - |
감독 | - |
주장 | - |
미디어 | |
텔레비전 | WSNS-TV |
라디오 | WCFL |
제휴 구단 | - |
시즌 성적 | |
정규 시즌 우승 | - |
디비전 우승 | 웨스트 디비전 (1972년~1973년) 이스트 디비전 (1973년~1975년) |
컨퍼런스 우승 | - |
애브코 트로피 | - |
2. 역사
월드 하키 협회(WHA)의 시카고 쿠거스는 1972년부터 1975년까지 활동한 프로 아이스하키 팀이었다.
1972-73 시즌, 쿠거스는 54점으로 WHA 서부 디비전 최하위를 기록했다. 팀 수비는 전체 8위, 공격은 최하위였으나, 밥 시친스키가 63개의 어시스트로 리그 5위를 기록했다.
1973-74 시즌에는 81점으로 동부 디비전 4위를 기록, 득점은 리그 7위, 실점은 6위를 기록했다. 팻 스테이플턴과 랄프 백스트롬은 각각 52개와 50개의 어시스트로 리그 9, 10위를 기록했다. 쿠거스는 이 해 유일하게 플레이오프에 진출, 동부 디비전 준결승과 결승에서 각각 뉴잉글랜드 웨일러스와 토론토 토로스를 꺾었으나, 고디 하우가 이끄는 휴스턴 에어로스에게 패배했다.[1]
1974-75 시즌에는 동부 디비전 3위, 전체 12위로 시즌을 마쳤다. 득점은 전체 10위, 실점은 전체 12위였다. 시즌 후 선수 소유주들이 자금 유치에 실패하면서 쿠거스 프랜차이즈는 해체되었고,[1] WHA는 미국 3대 시장(뉴욕, 로스앤젤레스, 시카고)에서 모두 철수하게 되었다.[1]
쿠거스는 1974년 플레이오프에서 홈 경기장 문제로 어려움을 겪었다. 인터내셔널 앰피시어터가 ''피터 팬'' 공연으로 사용 불가능해지자, 랜드허스트 트윈 아이스 아레나라는 작은 공공 스케이트 링크에서 경기를 치렀다. 결승 진출 후 앰피시어터의 얼음 냉각 파이프가 이미 해체된 상태여서 다시 랜드허스트로 돌아가야 했다. 한 스포츠 기자는 "쿠거스는 그들 모두의 가장 가벼운 상대, 피터 팬에게 졌다"라고 비꼬았다.[1]
2. 1. 1972-73 시즌
쿠거스는 54점으로 해당 시즌 동안 WHA 서부 디비전 최하위를 기록했다. 팀 수비는 총 295골을 내주며 전체 8위를 기록했고, 팀 공격은 245골로 최하위를 기록했다. 시카고의 유일한 희망은 밥 시친스키가 63개의 어시스트로 리그 5위를 기록한 것이었다.2. 2. 1973-74 시즌
쿠거스는 81점으로 동부 디비전 4위를 기록했다. 총 득점은 271점으로 리그 7위, 실점은 273점으로 6위를 기록했다. 팻 스테이플턴은 52개의 어시스트로 리그 9위, 랄프 백스트롬은 50개로 10위를 기록했다. 래리 매버티는 157분으로 리그 10위를 기록했다. 쿠거스는 그 해 유일하게 포스트 시즌에 진출했다. 동부 디비전 준결승에서 디펜딩 리그 챔피언인 뉴잉글랜드 웨일러스를 4승 3패로 꺾었다. 디비전 결승에서는 토론토 토로스를 4승 3패로 꺾었고, 쿠거스는 토론토 홈에서 열린 결정적인 7차전에서 5-2로 승리했다. 그러나 시카고는 하키 전설 고디 하우와 그의 아들 마크 하우, 마티 하우가 소속된 휴스턴 에어로스와의 AVCO 월드 트로피 결승에서 무기력하게 패배했다. 에어로스는 4경기에서 쿠거스를 압도하며 22-9로 시리즈를 스윕했다.[1]2. 3. 1974-75 시즌
쿠거스는 동부 디비전에서 3위, 전체 12위(61점)로 시즌을 마쳤다. 득점은 전체 10위(261골), 실점은 전체 12위(261골)를 기록했다. 래리 마베티는 페널티 시간 150분으로 리그 10위를 기록했지만, 시카고에서 57경기를 뛴 후 토론토로 트레이드되었다.[1] 시즌이 끝난 후 선수 소유주들이 더 많은 자금을 유치할 수 없게 되면서 쿠거스 프랜차이즈는 해체되었다.[1] 쿠거스가 사라지면서 WHA는 미국 내 3대 시장(뉴욕, 로스앤젤레스, 시카고)에서 모두 철수하게 되었다. 뉴욕 골든 블레이즈는 1973-74 시즌 초에 사우스 저지로 이전했고, 로스앤젤레스 샤크스는 1974년에 디트로이트로 이전했다.[1] 이후 선수 분산 드래프트에서 대부분의 선수들은 확장 팀인 덴버 스퍼스로 옮겨갔고, 스퍼스는 때때로 쿠거스의 후속팀으로 여겨진다.[1]북미 주요 프로 하키에서 마지막으로 활동한 시카고 쿠거스 선수는 커트 브래켄버리로, 1973-74 시즌에 쿠거스에서 4경기를 뛰었고, 1982-83 NHL 시즌 이후 NHL에서 은퇴했다.[1] 쿠거스 드래프트 지명 선수인 레지 르멜린은 1992-93 시즌까지 NHL에서 뛰었지만, WHA에서는 한 번도 경기를 뛰지 않았다.[1]
2. 4. 피터팬 사건 (1974년)
쿠거스는 1974년에 단 한 번 플레이오프에 진출했다. 뉴잉글랜드와의 첫 시리즈는 순조롭게 진행되었지만, 이후 두 시리즈는 여러 어려움을 겪었다. 인터내셔널 앰피시어터는 전 올림픽 체조 선수 캐시 릭비가 주연을 맡은 ''피터 팬'' 공연 때문에 2라운드에 사용할 수 없었다. 팀은 라이벌 시카고 블랙호크스(Chicago Blackhawks)의 홈구장인 시카고 스타디움과 내셔널 농구 협회(NBA)의 시카고 불스 경기장 사용을 협상했지만, 두 팀 모두 플레이오프에 진출해 사용할 수 없었다. 팀은 클리블랜드 아레나에서 경기를 치르는 것을 잠시 고려했지만, 일리노이주에 머물기로 하고 마운트 프로스펙트의 랜드허스트 빌리지(Randhurst Village) 옆에 있는 랜드허스트 트윈 아이스 아레나라는 공공 스케이트 링크에서 경기를 치르기로 했다. 경기장은 2,000명밖에 수용할 수 없었지만, 팀은 시리즈의 세 홈 경기를 랜드허스트에서 치렀다.[1]쿠거스가 토론토를 상대로 시리즈에서 승리했을 때, ''피터 팬'' 쇼는 이미 다른 곳으로 이동했고, 앰피시어터를 사용할 수 있었어야 했다. 그러나 앰피시어터에는 이동식 아이스 링크가 있었다. 앰피시어터 관계자들은 알 수 없는 이유로 하키 시즌이 끝났다고 판단하고 얼음을 냉각하는 데 사용되는 구리 파이프를 걷어내고 해체했다. 쿠거스는 결승전을 위해 랜드허스트로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쿠거스는 이러한 홍보 재앙에서 완전히 회복하지 못했다. 한 스포츠 기자는 "쿠거스는 그들 모두의 가장 가벼운 상대, 피터 팬에게 졌다"라고 비꼬았다.[1]
3. 역대 홈경기장
경기장 | 사용기간 | 수용인원 | 장소 | 비고 |
---|---|---|---|---|
인터내셔널 엠피시어터 | 1972년~1975년 | 9,000명 | 일리노이주 시카고 | |
랜드허스트 아이스 아레나 | 1974년~1975년 | 2,000명 | 일리노이주 마운트 프로스펙트 | 제2홈경기장 |
4. 시즌별 기록
시즌 | GP | W | L | T | Pts | GF | GA | PIM | 최종 순위 | 플레이오프 |
---|---|---|---|---|---|---|---|---|---|---|
1972–73 | 78 | 26 | 50 | 2 | 54 | 245 | 295 | 811 | 웨스턴 6위 | 진출 실패 |
1973–74 | 78 | 38 | 35 | 5 | 81 | 271 | 273 | 1041 | 이스턴 4위 | 쿼터 결승 승리 (웨일러스) 준결승 승리 (토로스) 결승 패배 (에어로스) |
1974–75 | 78 | 30 | 47 | 1 | 61 | 261 | 312 | 1086 | 이스턴 3위 | 진출 실패 |
합계 | 234 | 94 | 132 | 8 | 196 | 777 | 880 | 2938 |
5. WHA-NHL 합병 이후
쿠거스는 동부 디비전에서 3위, 전체 12위(61점)로 시즌을 마쳤다. 득점은 전체 10위(261골), 실점은 전체 12위(261골)를 기록했다. 래리 마베티는 페널티 시간 150분으로 리그 10위를 기록했지만, 시카고에서 57경기를 뛴 후 토론토로 트레이드되었다. 시즌이 끝난 후 선수 소유주들이 더 많은 자금을 유치할 수 없게 되면서 쿠거스 프랜차이즈는 해체되었다. (쿠거스가 사라지면서 WHA는 미국 내 3대 시장에서 모두 철수하게 되었다. 뉴욕 골든 블레이즈는 1973-74 시즌 초에 사우스 저지로 이전했고, 로스앤젤레스 샤크스는 1974년에 디트로이트로 이전했다.) 이후 선수 분산 드래프트에서 대부분의 선수들은 확장 팀인 덴버 스퍼스로 옮겨갔고, 스퍼스는 때때로 쿠거스의 후속팀으로 여겨진다.
북미 주요 프로 하키에서 마지막으로 활동한 시카고 쿠거스 선수는 커트 브래켄버리로, 1973-74 시즌에 쿠거스에서 4경기를 뛰었고, 1982-83 NHL 시즌 이후 NHL에서 은퇴했다. 또한, 쿠거스 드래프트 지명 선수인 레지 르멜린은 1992-93 시즌까지 NHL에서 뛰었지만, WHA에서는 한 번도 경기를 뛰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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